케인
문득 고개를 돌리니, 이미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좀 전까지만 하여도 햇빛이 쏟아져 내려 밝기 그지없던 주변은 어느새 붉은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아마 조금 지나면 저들은 검은 망토를 걸칠 것이다. 새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휘이’하고 바람이 열린 문을 통해 들어왔다. 나는 그제야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잊어버린 줄 알고 있었는데, 머릿속 어딘가에 숨어있던 그가 제 기억의 문을 두드렸다. 눈을 감았다가 느리게 뜨고는 거실로 향했다. 제 방만 불을 켜두었던지라 거실은 어두웠다. 더듬더듬 벽을 짚어 스위치를 눌렀다. 순간 밝아진 거실을 둘러보다가 차라리 좀 어두운 게 나을지도 따위의 생각을 잠깐 해보았다.
스위치를 좀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그대로 두었다. 그리고 부엌으로 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무언가 있을 리가 없었다. 아침에 먹은 컵라면이 아마 남아 있던 마지막 음식이었을 것이다. 고개를 뒤로 젖혔다. 잠시 그러고 있다가 냉장고의 문을 닫았다. 거실의 불을 껐다. 방에서 카디건 하나만 챙기고 밖으로 나왔다.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과 달리, 바깥에서 맞이하는 바람은 제법 쌀쌀하였다. 고개를 숙이며 인상을 쓰다가 천천히 걸어 나갔다. 양옆으로 지나다니는 사람이 썩 있었지만, 왠지 나는 이곳에 혼자 있는 거 같았다. 목적지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던 발이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그렇게 좀 걷고 나니 주변의 풍경이 좀 달라졌다. 정말로 사람들의 수도 줄었다. 자리에 서서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길 하나만이 쭉 뻗은 사막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전에 이와 비슷한 곳에 있던 적이 있었다. 젊었을 때의 패기 같은 것이었다. 펜과 종이만 들고 무작정 떠난 여행길이었다. 나는 이런 곳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는 당시의 이야기를 종이에 휘갈겼다. 그러면 그는 옆에 딱 붙어서 그에 맞춘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서로의 것을 확인하며 웃었다.
“되찾고 싶니?”
낯선 듯, 낯설지 않은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눈을 반짝 뜨니, 앞에는 화려한 무늬의 로브를 걸친 사람이 서 있었다. 모자를 푹 써서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양옆으로 묶어 내린 은색의 머리카락과 목소리로 유추해볼 때 소녀인 것 같았다.
소녀는 내 앞에 서 있다가 홱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녀를 왠지 따라갔다. 그렇게 그녀를 따라 걸어 도착한 곳은 호수였다. 나는 ‘이런 곳에 호수가 있었나?’하고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해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달의 영롱한 빛에 의지하여 호숫가의 풍경을 살폈다. 소녀는 나의 옆에 서 있다가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자리에 앉았다. 나 역시 그녀를 따라 앉았다.
“아직도 그 수첩 있어?”
나는 그녀의 질문에 손을 들었다. ‘갖고 나왔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손 위에는 서랍 속에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그와의 이야기를 써두었던 수첩이 들려 있었다. 소녀는 그것을 보더니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그러자 소녀는 수첩을 양손으로 꼭 잡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것을 호수 속으로 던졌다. 수첩은 찰랑 맑은 물소리를 내더니 서서히 물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고 있던, 나는 점점 눈을 가늘게 떴다. 소녀를 올려다보았다. 소녀도 나를 보고 있었다.
“집에 가.”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는 따라오지 않았다. 나는 처음 온 그 길을 그녀의 도움 없이도 걸어 나갔다. 그리고 두 그루의 커다란 나무 사이에 있는 나무문의 문고리를 익숙하게 잡아 돌렸다. 그러자 눈앞에는 집의 거실이 나타났다, 불을 켜지 않아 어두운 거실이.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그가 있었다. 그의 손에는 물에 푹 젖은 나의 수첩이 들려 있었다. 그의 주변으로 방울방울 우리의 추억들이 피어올랐다. 아무 이유 없이 뛰었던 잔디밭, 우리들의 이야기를 그린 글과 그림, 해맑은 그와 나, 풍족하진 않았지만 자유롭던 우리……. 나는 그것들을 차근차근 살펴보다가 이끌리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이 움직였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데 그의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되찾고 싶었니?”
빛이 발했다.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빛이 거실을 가득 메웠다. 그러다가 사라졌다. 우리들의 추억을 담고 있던 비눗방울들도, 그도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로브를 입은 소녀가 있었다. 소녀가 모자를 벗자 다시금 그녀가 아스라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그가 나타났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희미해지는 시선에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그러자 뺨을 타고 눈물방울이,
내 대답이
흘러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