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루 / 유성
오늘도 나는 혼자였다. 나 이외의 사람의 온기가 사라진지 오래인 내 원룸의 창 너머로 붉게 해가 스러지고 있었다. 천천히, 천천히, 그렇게 수평선 너머로 침몰하는 해를 보고 있었다. 분명 저 하늘 높이 해가 떠있던 것이 방금 전인 것 같았는데 벌써 노을이 창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노을은 해가 남긴 마지막 혈흔일 것이었다. 그렇게 잔뜩 붉게 물든 창문과, 창문 너머의 하늘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그 붉은 잔해들이 점점 어둠에 잠식되어가며 지워지고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밤의 치마 끝자락의 레이스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그저 막연히 바라보며 손에서 살며시 펜을 놓았다. 놓았다기보다는 손끝에서 떨어져 흘러내렸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비어버린 손으로 무심히 턱을 괴었다. 오늘따라 창밖의 모습이 무언가의 기억을 자극하는 것만 같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붉은 것과 검은 것. 그 사이의 경계에서 그것들을 더 확실히 나누려는 듯 바람이 불었고 그 바람의 등 위에 새들이 올라타 떼를 지어 날아가고 있었다. 어쩐지 쓸쓸하고 적막하고 외로운 그 모습을 보다 문득 속에서 울컥 하고 치미는 것이 있었다. 그 때문에 창밖을 계속 보고 있기가 어쩐지 불편해 작은 원룸에 있는 작은 책상에서 일어났다. 드르륵, 의자 끄는 소리가 유난히 더 크게 들렸다. 순간 책상에 뒤집어 세워놓았던 탁상액자가 툭, 하고 쓰러졌다. 순간 액자에 넣어둔 사진이 보였다. 오늘과 같은 저녁 날, 꼬옥 손을 잡고 있는 나와 누군가의 뒷모습. 사라진지 오래인, 이제 거의 잊어가기 시작한 기억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아니, 잊어가기 시작했다고 믿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세월의 갈피 어딘가에서 놓쳐버린 그 사람이 순간 떠올랐다. 내 머릿속에서 눈을 떴다. 어느 순간 날 잠식해간다. 답답한 마음에 그 좁은 원룸에서 장소를 옮겨보고자 했다. 거실이라고 하기에도 뭐하지만 나름 작은 소파와 맞은편에 TV를 둔, 그 거실 비슷한 곳으로 비척비척 걸어가 엎어져버렸다. 소파에 고개를 묻고 그냥 눈을 감았다. 그 사이에 해가 모두 어둠에 먹혔는지 어둑어둑, 깜깜하다.
순간 엎드려 있는 나의 배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알 수 없는 이런 우울한 감정에도 배고픔을 착실히 느끼는 내 몸은 참으로 정직하다. 시간을 보니 평소 저녁을 먹던 때를 훨씬 넘어 있었다. 늦었지만 뭐라도 만들어 먹을까 싶어 한 구석에 있는 냉장고를 열어 먹을 것을 천천히 뒤져보았다. 하지만 있는 거라곤 계란 몇 개, 참치캔, 즉석 햄 정도밖에 없었다. 냉장고 안조차도 삭막하기 그지없다. 평소 같으면 그 남아있는 재료들로라도 조촐하게 밥을 때웠지만 오늘따라 그 동안의 변함없던 메뉴에 입맛이 물린다. 밖에서 뭔가 사오거나 안 되면 도시락이라도 사먹어야 겠다고 생각하며 신발을 챙겨 신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한참을 기다려도 꼭대기에 멈춰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 통에 결국 계단을 통해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텅 빈 비상구에 계단을 밟는 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예전에 한 번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는 바람에 더운 여름 날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너와 이 계단을 오르던 일이 생각나 괜시리 자조적인 웃음이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여름이지만 조금 쌀쌀했다. 그 전에 며칠 동안 장마니 뭐니하며 한참 비가 온 것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해가 지고 바람이 불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까 얼핏 들은 바로는 밤에는 비가 온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공기 중에 습기가 농후에 내 숨을 턱턱 막히게 하면서 목을 조여 오지만 덥지라도 않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도로를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아니, 아무도 없다고 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인 것 같다. 그렇게 걸으며 뭘 사야할지 천천히 생각해보았다. 아, 정말 뭘 먹지. 옆에 있는 작은 마트에 갈까 생각했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에 밥을 해먹기도 귀찮아서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러다 갑자기 언젠가 친구가 어딘가에 무슨 가게가 개업을 했는데 어떤 메뉴가 맛있더라, 라고 하며 같이 갔었던 것이 생각났다. 다른 사람들도 있을텐데 아무래도 혼자 먹는건 조금 껄끄러워 조금 걱정은 됐다. 포장도 된다고 했던게 생각나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밖에서 혼자 먹을걸 걱정한건 언제부터였더라? 사실 잘 모르겠다. 그동안은 항상 네가 내 옆에 있어주었으니까.
친구와 함께 갔던 그 얄팍하고 희미한 기억력에만 의존해서 잘 모르는 동네의 길로 접어들었다. 내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만 같다. 왠지 모르게 센치해진다. 가슴 한켠에서 공허함도 느껴지는 것 같다. 언젠가 즐겨 듣던 나 지금 센치해, 따위의 가사가 귀 근처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아까보다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지만 내 주위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았다. 정말 오늘은 이상하게 감성적이다. 오랜만에 책상에 앉아 펜으로 쓱쓱 손가는대로 이리저리 선을 그어 그림을 그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구를 그리려고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예전에 자주 하던 것처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곧 그것이 너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로 인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너로 인해 그것을 그만두었고, 또 너로 인해 종종 그림을 그리게 된다. 오늘도 시작은 아무런 의도도 없었지만 결국은 너의 얼굴로 끝나고 말았다. 갑자기 너의 생각이 물밀듯이 생각난다. 너와 보낸 시간, 너와 보낸 하루, 너와 보낸…. 사무치듯 그리워지기 시작하며 마음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아직은 괜찮지 않은가보다. 그 때 저 앞에서 누군가 천천히 다가왔다. 처음에는 그저 날 스쳐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내 앞에 오더니 멈춰서서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특이한 복장이었다. 특이하기 보다는 몇 년 전에나 유행하던 옷이었다. 맞아, 나도 저땐 남자가 저렇게 입는거 좋아했었는데. 모자를 눌러 쓴데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그 사이로 마주친 눈이 어딘가 낯익어서 그 낯선 누군가가 무섭거나 두렵지는 않았다. 그는 나를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되찾고 싶어?"
먼저 침묵을 깬 것은 그의 쪽이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기 위해서 그를 빤히 올려다보기만 했다. 무엇을 되찾고 싶냐고 물은 것일까. 지금 내가 찾고 싶은 것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너를 제외하면.
그는 멀뚱히 서있기만 하는 나를 이끌어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홀린 듯이 그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밥생각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렇게 시간감각도 사라진 채 걷다보니 호수가 보였다. 어째서 이 곳으로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기에 나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도 이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말없이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다. 호숫가 벤치에 앉아 서늘하게 부는 습한 바람을 느꼈다. 그러다 일어나서 주변의 돌멩이를 주워 호수로 퐁당퐁당 던져보기도 했다. 동심원을 그리며 금방 가라앉는 돌멩이를 보다 또 하나 더 던지고, 채 사라지지 못한 동심원 옆으로 또 다른 동심원이 생기고, 그리고 또 한 번 더 던지고, 또 다시 동심원이 생기고, 그러면 나는 또… 그런 나를 보며 그는 내게 작은 돌멩이들을 계속해서 쥐어주었다. 내가 돌멩이를 찾아 헤메지 않을 수 있도록, 힘들이지 않도록, 돌멩이를 던지고 관찰하는 그 무의미하면서도 중요한 행위에 집중할 수 있도록. 나는 던지고 그는 주워주는 그런 알 수 없는 놀이를 계속해서 반복했다. 돌멩이가 물의 표면에 닿아 만들어내는 작고 귀여운 소리가 우리 사이의 침묵이라는 빈 여백을 채워주었다. 그 사이에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고 바람도 많이 차가워졌다. 내일은, 또 비가 올까. 돌멩이를 호수에 던지는 것을 그만두고 다시 호숫가에 앉았다. 또 다시 침묵. 그러다 그가 입을 열었다.
"그거, 나 줘. 네가 그리던 것."
무슨 뜬금없는 소린가 싶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머니를 이리저리 뒤적거리니 바지 뒷주머니에서 몇 번 접힌 그것이 나왔다. 언제 주머니에 넣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흔쾌히 주지 못하고 머뭇머뭇 건네는 내 손에서 그는 그 종이를 살며시 받아 쥐었다. 그걸 받은 그는 종이에 마구 그어진 선들과, 그 선들이 만들어낸 그림과, 그 그림이 나타내고 있는 너의 얼굴을 한참동안이나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에게 평가받는 기분이 들어 조금은 기분이 불안해지면서도 불편해진다. 그러더니 그는 그것은 마구 구겨서 물에 던져버렸다. 그 종이는 물에 잔뜩 젖어 흐물흐물 녹아버리며 가라앉아갔다. 형체도 알 수 없을 만큼 망가지며 물에 가라앉는다. 나는 너무도 당황스러운 마음에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태연하기만 하다. 그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없는 것만 같았다. 내가 지금 화가 나려 한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그렇다고 해서 영영 가버린 사람이 돌아오는 건 아니잖아."
"…."
"이제 돌아가. 조금 있으면 비가 올 것 같으니까."
"…."
"이미 끝난 일에 연연하지 말고."
"…."
"집에 가."
나는 그를 호수에 남겨두고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너의 얼굴을 그린 것인데. 그것을 함부로 아무렇게나 물에 던져버리고는 뻔뻔하게 나를 대하는 그가 미웠다. 처음 보는 사람일텐데도 그가 미웠다. 그래서 그가 어떻게 되든 말든 말도 없이 벌떡 일어나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길은 잘 알지 못했지만 그저 걸었다. 발이, 내 몸이 기억하는대로 그냥 걸으니 잘 아는 길이 나왔고, 나의 집이 있었다. 오늘 정말 이상해. 그렇게 생각하면서 집으로 들어갔다. 여느 때처럼 어둠과 고독이 내게 달려와 안기지만 평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불을 켤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비척비척 소파로 다가갔다. 그곳엔 네가 있었다. 어쩐 일인지 네가 있었다. 여기 있을 네가 아닌데도 네가 있었다. 너는 분명 아까 호수에 던져져 녹아버린 그 종이를, 그 그림을 들고 있었다. 구겨지긴 했지만 물에 녹은 흔적은 없었다. 아아, 그래 그는 너였다. 너는 그였다. 이미 '죽은' 너를 너무 보고 싶어하는 나를 위해 잠시 나를 찾아온 너였다. 보고 싶었다고, 그리웠다고, 네가 죽은 뒤에, 네가 떠난 뒤에 많이 힘들었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정작 목소리는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너는 예전처럼 상냥하게 살풋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되찾고 싶었니,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