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카리


 하늘에 붉은 물감이 퍼졌지만, 가장 붉은 색은 사라지고 있었다. 시계는 벌써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남색의 물감이 서서히, 그리고 여기저기 손을 뻗어오고 있었다. 정신은 이미 밖을 바라보는데 팔려있었다. 결국 이상한 꽃만 그리고 있던 붉은 펜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까마귀가 까악 거리고 바람은 귀신 소리를 낸다.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이라도 되는 것 같다. 마침 배도 고프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 위에 놓여있던 액자에 눈이 갔다. 나는 누군가와 웃고 있다. 그 누군가의 이름도 성격도 나이도 모두 잊은 지 오래다. 그런 사람에게 눈길을 더 줄 생각은 없어서 방문을 열었다. 나 혼자 있는 집 안은 당연히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거실을 불을 켜고, 부엌의 불까지 켠 나는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인스턴트식품조차 없는 냉장고는 썰렁했다. 라면이나 찾아봐야겠네. 이번에는 수납장을 열었다. 5개 묶음의 커다란 봉지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나가야하는 거냐. 얼굴을 찡그렸다.

  결국 오래 신어서 밑창이 닳은 슬리퍼를 발에 꿰었다. 여름치고는 제법 쌀쌀했지만, 반팔로 못 견딜 정도는 아니어서 다시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여름치고는 제법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외진 곳이라서 그런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편의점, 아니면 분식? 셋 다 아니다. 나는 아예 마트로 가기 위해서 발걸음을 돌렸다. 집 근처에 마트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버스에 올라탔다. 좀 멀리 있는 시장이라도 가야했다. 버스는 빠르게 지나갔다. 때로는 정류장에서도 멈추지 않고, 때로는 신호도 확확 지나가버리면서. 익숙한 정류장 이름이 나오자 벨을 눌렀다. 옆 동네 마트는 깜깜했다. 오늘은 둘째 주던가. 의무 휴일인가보다. 인상을 찌푸려봤자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온 것이 아까우니 밥이라도 먹고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에 모르는 길로 들어섰다. 핸드폰 배터리도 78%. 넉넉하다.

  아예 모르는 길이라서 잔뜩 긴장을 하고 들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는 곳과 별 다를 것은 없다. 하지만, 저녁의 식당가라기엔 사람이 너무 없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연 식당도 얼마 없는 것 같은 느낌이고.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었다. 바스락거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아마도 아까 그리던 이상한 꽃의 연속일 것이다. 요사이 나는 계속 그것들만 그려대고 있었다. 그것이 액자 속 사람과 관련 있는 걸까. 액자 속 누군가는 나와 무슨 관계 인 것일까.
  맞은편에 드디어 사람 한 명이 나타났다. 하얗고 긴, 원피스라기엔 드레스에 가까운 옷을 입은 사람이 베일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점성술사 같다.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나에게 그-인지 그녀인지는 몰라도- 는 다가왔다.

“되찾고 싶어요?”

  저건 또 뭔 거지같은 소리야. 나는 인상을 찡그리지만, 그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결국 그와 함께 걸었다. 이리가도 따라오고 저리가도 따라오는 탓이었다. 결국 내가 멈춰 섰더니 그가 손을 까딱까딱 거렸다. 그리고서는 긴 치맛자락을 질질 끌면서 식당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얌전히 따라갔다. 여기서 그를 버리고 간다면 그는 졸졸 쫓아올 것만 같았다. 그는 식당가를 벗어나서 주택가에 들어서더니, 이내 이름 모를 공원의 호수에 도착해서야 걸음을 멈췄다.
  그는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저 호숫가에 있는 자갈 하나를 주워들어서 퐁당퐁당 소리를 낼 뿐이었다. 나도 그 옆에서 자갈을 주워들었다. 대신 나는 돌을 옆으로 던졌다. 퐁퐁퐁퐁 하는 소리와 함께 돌이 가라앉았다. 그와 함께 태양도 가라앉았다.

“주머니에 있는 종이, 주세요.”

  그건 어떻게 안거지? 솔직히 나는 이제 아무 생각이 없어질 지경이었다. 실제로도 그런 행동을 하고 있어서. 이상한 꽃이 가득한 그 종이를 나는 넘겨주었다. 그는 빨간 꽃이 가능한 그 종이를 쳐다보았다. 내가 봐도 기괴한 그 그림을 그는 얌전히 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호숫가에 떨어트렸다. 종이가 물을 머금고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호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빠지고 있는 종이를 보고 있는 걸까.

“집에 가세요.”

  나는 그의 말대로 집으로 향했다. 배가 고프니 근처 편의점에서 샌드위치와 탄산음료 캔 하나를 계산해서 입에 물었다. 핸드폰 켜서 여기가 어딘지 알아보았다. 의외로 우리 집과 가까운 곳이어서 나는 걸어가기로 했다. 가는 동안은 이어폰을 꼽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 몇 곡을 흥얼거렸다. 지도를 보면서 조금은 헤맸지만, 그래도 평소보다 빨리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방에 불을 켜두었기에 어두운 거실을 그대로 가로질렀다. 하지만, 나는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없어야할 소파에 누군가의 다리가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액자 속에서 늘 보던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얌전한 포개어진 무릎 위에는 분명 내가 그린 이상한 꽃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젖고, 물을 먹어서 흐물흐물 해지고 쭈글쭈글해진 꽃들. 그가 말했다.

“되찾고 싶었어요?”

  길거리에서 말을 걸었던 누군가와 목소리였다. 나는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바닥에 끌려서 더러워진 밑단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