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영 / 모래성



1.


  목이 너무 뻐근해서 나는 한번 목을 돌렸다. 몇 시간 동안 목을 숙이고 있던 탓이었다. 목을 돌리다가 나는 창문 밖의 풍경을 우연히 봤다. 아까까지만 해도 밝았는데 지금은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넘어가고 있었다. 벌써 해가 지는구나. 처음 펜을 잡고 스케치를 한 게 오전 11시쯤이었는데. 나는 시간의 속도에 속으로 감탄했다. 오늘 내로 스케치를 끝내야 한다. 나는 다시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다. 캔버스 위에는 새로운 선들이 마구잡이로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닥에는 지우개 가루들과 미완성인 채 버려진 캔버스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머리를 비우고 다시 스케치를 해야겠다. 나는 이젤을 방 구석으로 치우고 의자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밖에는 어둠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었다. 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하얀 새 한 마리가 붉은색 지붕 위에 사뿐히 앉아있었다. 새는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봤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갑자기 새가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마치 성난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았다. 처량한 울음소리가 내 귀에 선명히 박혔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에 기댔다. 담배를 한번 털었다. 새는 날아갔다. 새가 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나는 날아가는 새를 눈으로 쫓아갔다. 저렇게 울고 떠나가는 모습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하도 만난 지 오래된이라 이름이 바로 생각나지 않았다. 오래 생각한 끝에야 수면 위로 떠오른 사람, A. 나는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버렸다. 오늘은 그만할까. 계속 잡념에 빠지기만 하는데. 나는 거실로 갔다. 전등 스위치를 켜자 깜깜했던 거실이 밝아졌다. 거실 창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걷었다. 세상은 이미 어둠에게 집어삼켜져 있었다.

 
 거실 시계를 보니 저녁 7시 반이었다. 부엌으로 가 냉장고를 열었다. 텅텅 비어있었다. 편의점에 가야겠다.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만 입고 밖에 나온 나는 금방 후회했다. 밤이 되었다고 찬바람이 쌩쌩 불고 있었다. 얇은 후드집업이라고 걸치고 나올 걸 그랬다. 나는 느긋하게 거리를 걸었다. 거리에는 매연도, 사람들의 말소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나밖에 없었다. 이상했다. 이 시간에 이렇게 사람들이 없을 리가 없는데. 내가 지금 걷고 있는 거리의 끝에는 통행량이 많은 사거리가 있었다. 그래서 바글바글까지는 아니어도 제법 사람들이 넘치는 길이다. 그런데 오늘은 왜 이렇게 한산할까. 그러나 나는 이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 거리가 침묵하고 있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다. 거기서 오는 새로움이 나는 좋았다. 목적지인 편의점은 내가 방금 지나친 골목길로 들어가야 하지만, 나는 목적지를 막 바꿨다. 이 새로움을 조금 더 만끽하고 싶었다. 이 거리를 조금 더 걷고 싶었다.




2.


  아, 나는 한숨을 내뱉었다. 한산한 곳의 매력을 조금 더 느끼고자 했던 것이 잘못이었던 걸까.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나는 지금 모르는 곳에 와 있었다. 휴대폰을 꺼내 여기 위치를 알아내려고 했으나, 휴대폰은 배터리가 닳아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불이 켜져 있는 가게는 없고,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동네에 파출소 하나 정도는 있기 마련이니까, 파출소를 찾아가면 될 것 같았다. 파출소를 찾는 것도 문제긴 했으나, 더 큰 문제는 바로 경찰에게 이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나이를 제법 먹은 성인이 미아가 되었다는 게 쪽팔렸다. 그러나 공복이 더 무서웠고, 모르는 곳에서 노숙을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강했다. 근처에 하천이 있는 것 같았다. 조금씩 내 시야에 자리 잡던 안개가 지금은 자욱해졌다. 안개는 내게 익숙한 존재였다. 왜냐하면 내가 안개가 잘 끼는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리려던 것도 안개가 낀 마을의 모습이었다.
  계속 걷다보니, 옛날 생각이 났다. 예전에도 지금처럼 안개가 낀 상황에 미아가 된 적이 있었다. 어렸을 때 우리 가족이 키웠던 강아지 뽀삐가 집을 탈출했다. 뽀삐를 무척이나 귀여워했던 나는 울면서 뽀삐를 찾았다. 야심한 시각에도 집에 들어가지 않고 뽀삐를 애타게 불렀음에도 뽀삐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울 힘도, 걸을 힘도 없어서 그제야 집에 가려고 했었다. 그러나 안개 때문에 길을 잃어버렸다. 뿌옇게 안개가 낀 시야인데다가 작은 두뇌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그때, 안갯속에서 불쑥 작은 손이 튀어나왔다. 나는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손은 A의 손이었다. A는 큰 목소리로 나를 찾았다며 우리 부모님을 불렀다. 만약 A가 찾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까지도 부모님 품에 돌아갈 수 없었겠지. 나는 무사히 가족들의 품에 돌아왔지만, A는 나와 달리 마을에 돌아오지 못 했다.


  A는 항상 웃고 다니는 아이였다. 아이답게 천진난만한 미소였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 미소와 어울리지 않게 A는 항상 엉망이었다. 언제나 얼굴은 피투성이였고, 다리 곳곳에는 푸르스름한 멍들이 있었다. 나는 누가 A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알고 있었다. 바로 A의 아버지였다. 그는 마을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다. 도박꾼이자, 알코올중독이자, 싸움꾼으로.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A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A가 잘 버티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어느 날,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던 나는 그네를 타고 있던 A를 발견했다. 나는 곧바로 A에게 달려갔다. A의 얼굴과 몸은 평상시와 똑같았다. 나는 A에게 그네에서 내려오라고 말했다. A는 내게 다가왔다. 나는 A의 얼굴에 반창고를 붙여줬다. A, 아프지 않아? 아파. A는 아무렇지도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왜 항상 웃고 다녀? 아빠한테 맞으면 아파하고, 울어야 하는 게 정상 아니야? 내가 말했다. A는 고개를 숙였다. 언제나 빛을 잃지 않았던 얼굴이 그림자가 져서 그런지 몰라도 어두워 보였다. 아파. 그런데 내가 웃지 않으면 엄마가 속상해 하셔. A는 살짝 웃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미소로 가려져 있던 A의 뒷면을 봤다.
  똑같은 일상이 흐르고 있던 마을에 불쑥 이방인이 나타났다. 하나같이 험악한 인상의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마을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싫어했다. 이방인 주제에 예의 없이 들쑤시고 다니는 사람들을 그 누가 좋아하겠는가. 오늘은 윗집 방앗간 아저씨한테 시비를 걸었고, 어제는 지나가던 미용실 아가씨에게 추파를 던졌고, 그저께는 고스톱 치던 할아버지에게 사기를 쳤다. 난데없는 오물들로 오염이 된 마을. 과연 오물들을 부른 이는 누구인가.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고 있었다. 그들은 A의 아버지 때문에 온 사람들이었다. 도박에 미친 A의 아버지는 도박을 계속하기 위해 그들에게 돈을 지속적으로 빌렸다. 대략 5억 정도 되는 돈을 빌리고도 돌려주지 않는 A의 아버지 때문에 그들은 우리 마을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나는 자신이 왕이라도 된 마냥 굴었던 A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허리를 굽히고 비는 모습을 볼 때마다 속이 후련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A를 괴롭히는 A의 아버지를 미워했나 보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하나만 알지, 둘은 몰랐다. 그들에게 허리를 숙이고, 굽신거렸을 때 쌓였던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겠는가. 당연히 A와 A의 어머니를 통해 해소됐다. 날이 갈수록 A는 더 많은 상처와 더 많은 멍들을 달고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그런 A가 안쓰러워 어떤 날에는 우리 집에서 재워주고, 어떤 날에는 해가 질 때까지 A의 곁을 지켜줬다.
  이방인들이 우리 마을에 온 지 한 달이 되었을 때, 나와 A는 평소와 같이 학교를 마치고 마을 놀이터에서 모래성을 쌓고 있었다. A, 어때? 내가 물었다. 음, 괜찮은데 조금만 더 쌓자. A는 어디선가 양손 가득 모래를 받아 가져왔다. 모래는 비처럼 내려 나와 A의 모래성 위에 살포시 앉았다.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A, 이럴 거면 모래는 왜 가져온 거야? A는 머쓱한지 웃고만 있었다. 나도 A를 따라 웃으며 말했다. 너 정말 바보 같아. A는 또 웃기만 했다. 나와 A의 웃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 했다. 불청객이 불쑥 끼어든 탓이었다. 불청객들은 이방인들이었다. 예상치 못한 빚쟁이들의 등장에 나는 당황했고, A는 내 뒤에 숨어버렸다. 내 옷깃을 잡고 벌벌 떠는 A 때문에 나까지 떨었다. 이방인들 중 하나가 다가왔다. 야, 느그 아부지 성함이 뭐냐? 침묵이 흘렀다. 야, 느그 아부지 성함이 뭐냐고. 그는 주먹으로 내 뺨을 때렸다. 나는 나둥그러졌다. A는 시퍼런 안색으로 내게 다가와 괜찮냐고 묻는다. 세상이 핑글핑글 돌고 머리가 띵해서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해줄 수가 없었다. 어, 이 년이 아니라 저년이었네?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놔주세요. 놔주세요! A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덕에 몽롱했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A는 남자에게 머릿채가 잡혀 있었다. 야, 느그 애비가 니 팔았다. 이방인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머릿속에서 붉은색 경보가 울렸다. A는 이방인들에게 끌려갈 판이었고, 어린 나에게는 이방인들을 물리치고 A를 구할 힘이 없었다. 강한 어른의 힘이 필요했다. A는 울먹거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놀이터 밖으로 도망쳤다. A는 내 이름을 처절하게 불렀다. 내가 얼른 어른을 불러오는 게 A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A의 외침에도 집으로 달려갔다. 아빠와 함께 놀이터에 도착한 후에는 완성이 되지 않는 모래성밖에 없었다. 나는 두 번 다시 A의 천진난만한 미소를 볼 수 없었고, 우리들이 만들고 있었던 모래성도 영원히 미완으로 남아 있었다.
  A는 죽었을까, 아니면 아직도 살아 있을까. 갑자기 A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내 반대편에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안개에 가려져 있던 그 사람의 모습이 점점 더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상당히 정돈이 되어 있지 않는 붉은 머리의 여자였다. 여자의 얼굴은 비정상적으로 햐얀 얼굴이었다. 짙게 칠한 아이라인은 많이 번졌으며, 한쪽 눈에는 속눈썹이 붙어있었지만 다른 눈에는 붙어있지 않았다. 입술은 쥐를 잡아먹은 것처럼 빨갰다. 여자는 몸에 딱 달라붙은 흰색 나시와 자칫하다가 팬티가 보일 정도로 짧은 치마를 입고 있으며, 맨발이었다. 여자의 모습은 술집 여자와 비슷했다.

"되찾고 싶어?"

 여자는 나와 스쳐 지나갈 때 말했다. 몸은 성인 여성이면서, 목소리는 영락없는 어린아이의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란 눈으로 여자를 쳐다봤다.

"다시 보고 싶지 않아?"

 나는 여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나를 다시 보고 싶어 했잖아."

여자는 내 두 손을 잡고 말했다. 미친 여자에게 잘못 걸린 것 같았다. 나는 여자에게서 도망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여자의 악력이 세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왜… 왜… 이러세요"
"그때는 도망쳤겠지만, 지금은 도망 못 가. 우리 모래성 완성해야 하잖아.

  여자는 나를 끌고 뛰기 시작한다. 나는 끌려가면서 주변을 살펴보았으나 도움을 청할 곳도, 사람도 없었다. 여자는 빨리 달리는 탓에 나는 금방 숨이 차올랐다. 똑같이 빠른 속도를 유지하는 여자와 달리, 나는 점점 속도가 느려졌다. 결국 지친 나는 돌에 걸려 넘어졌다. 무릎이 까져 피가 나고 있었다. 여자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괜찮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비밀."

  여자는 활짝 웃으며 내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또다시 뛴다. 이번에는 전과 비교해서 속도가 느려졌다. 아무래도 다친 나를 배려하는 것 같았다. 나와 여자는 사람이 아무도 걷지 않는 여러 개의 골목길에 들어가고, 나왔다. 이번에 들어간 골목길은 눅눅한 습기가 느껴졌다. 여자는 골목길을 빠져나오자마자 멈췄다. 나도 멈췄다. 나와 그녀가 도착한 곳은 숲의 입구였다. 숲은 불길한 기운을 가득 품고 있었다. 나는 무서웠다. 또다시 여자의 손에서 내 손목을 빼려고 했지만 역시 뺄 수 없었다. 여자는 숲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숲길은 그렇게 만만한 길이 아니었다. 갑자기 길이 움푹 패어있기도 하고, 낮게 깔려있는 가시덩굴이 있어 그것을 뛰어넘기도 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내가 뒤에서 헉헉 거리자, 여자는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힘들어?"

 나는 너무나 힘들어서 대답도 못하고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미안, 넌 인간이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어."

  여자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와 여자는 근처에 있는 큰 나무에 기대 몇 분 쉬다가 또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뛰지 않고 걸었다. 진작에 걸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 애초에 내가 집 밖을 나오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나와 여자는 숲 속을 빠져나왔다. 나와 여자를 반기는 것은 큰 호수였다. 어렸을 때 내가 살던 마을 근처에 있는 호수였다. 여자가 내 손목을 놓았다. 손목을 확인하니 손목에는 여자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나는 다른 손으로 손목을 만지고, 가볍게 손목을 돌렸다. 아무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 여자는 나를 끌고 왜 이곳으로 온 것일까.

"여기서 모래성을 만들자!"

 여자는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그 모습이 마치 꼬마 같았다.

"사실은 놀이터에서 만들고 싶었는데, 내가 오늘 호수 밖에 꽤 오래 있어서 그런지 놀이터에 갈 힘이 없어. 그리고 나는 원래 호수를 벗어나면 안 되는 몸이거든."

  여자는 나를 향해 쫑알쫑알 말했지만,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여자는 왼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이리로 오라는 손짓이었다. 나는 더 이상 여자와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배도 고프고, 피곤했다. 나는 몸을 뒤로 돌려 또다시 그 숲에 들어갔다. 그 호수가 마을 근처에 있는 호수가 정말로 맞는다면, 이 숲은 호수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숲이었으며, 이 숲 어딘가에는 마을과 이어지는 길이 있었다. 아까와 달리 몇 마리의 까마귀가 내 주위를 날며 울었고, 바람이 불었다. 나는 두 손을 꽉 쥐고 달렸다. 목적지는 마을로 갈 수 있는 길이었다. 만약 내가 그 길을 찾고, 그 길을 따라 마을에 도착한다면 아무 사람이나 붙잡아서 도움을 요청할 것이다. 그리고 혼자 남겨진 그 여자는, 본인이 알아서 하겠지. 더 이상 저 여자와 관계되고 싶지 않았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산책로가 눈에 들어왔다. 저 길이구나. 나는 길을 따라서 뛰었다. 한참을 뛰었을 때, 나는 희미한 빛을 발견했다. 나는 희망찬 얼굴로 빛을 향해 달려갔다. 빛은 숲 너머 어떤 물체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고, 그 물체가 마을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숲을 빠져나왔다. 내 예상과 달리, 나는 다시 호수로 돌아왔다. 허탈했다. 그녀는 호숫가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나는 또다시 몸을 돌렸다. 여자가 내 앞에 있었다. 나는 뒷걸음질을 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자는 호숫가에 있었는데.

"내가 아까 그랬잖아. 너는 두 번 다시 도망 못 간다고."

  여자가 낮게 깐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정말로 집에 가고 싶으면, 나랑 모래성 만들자. 그러면 보내줄게."

  여자는 호숫가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여자의 뒤를 따랐다. 일단 여자와 어울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나와 그녀는 호수 근처에 쪼그려 앉았다. 모래는 없고 진흙밖에 없었다. 나는 진흙으로 성을 만들기 시작했다. 여자는 무릎 위에 손을 올려놓고 내가 하는 것을 빤히 쳐다봤다. 내가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니 여자는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진흙에 손을 댄다. 마을 근처에서 여자와 성을 만들고 있으니, 예전에 A와 만들던 모래성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여자는 모래성을 만들고 싶어 하던데, 진흙성이라도 괜찮은 건가. 아무런 말도 없는 것을 보면 재료는 상관이 없는 것 같았다. 진흙성은 완성이 되었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다리를 주물렀다. 오랜 시간 동안 쪼그려 앉아 있었더니 다리가 저려왔다.

"이제 집에 보내주세요."

  갑자기 깜깜해졌다. 나와 그녀가 만들었던 성도, 여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당황해서 벌떡 일어났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검은색밖에 없었다. 평상시에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꽉 들어찼던 머릿속이 텅 비었다.

"줘."

  그때 노이즈가 잔뜩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 들려오는 것인 지는 몰랐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줘."

  나는 귀를 막고 제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계속 무언가를 달라는 소음이 나를 괴롭혔다.

"도대체 뭘 달라고 하는 거야!"
"네가 오늘 그리고 있었던 그 그림을 내게 줘."

  그 그림은 집에 있다. 집에 있는 그림을 무슨 수로 가져오는가.

"아니, 그 그림은 네 발 앞에 있잖아."

  그 말에 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내 발 앞을 확인했다. 캔버스가 있었다. 캔버스 위에는 미완성된 연필선밖에 없었다. 나는 캔버스를 잡았다. 분명 사라진 것이 분명했던 여자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여자는 고개를 숙여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벌벌 떨고 있었다. 여자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캔버스를 건네줬다. 여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캔버스를 뚫어져라 쳐다보고만 있었다.

"여긴 아직 그대로야?"
"…잘 몰라요."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마을을 떠난 지 10년이 넘었다. 부모님이 살아계셨을 적에는 몇 번 찾아갔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마을에 내려가지 않았다. 독한 벌레들이 모여있는 도시에서 내 작은 밥그릇 하나 지키는 데에 바빠서 마을에 갈 생각을 못 했다. 여자는 한 손으로 캔버스 속 집들이 모여있는 곳을 부드럽게 쓸었다. 캔버스 위에는 갓 떨어져 마르지 않는 눈물 몇 방울이 묻어있었다.

"집에 가고 싶어?"

  그녀가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그림 내게 줘."

  저 그림은 4개월 후에 열릴 전시회에 전시될 그림이었다. 전시회를 생각하면 주고 싶지 않았으나, 아직 스케치도 완성되지 못한 그림이었다. 스케치야 다시 하면 된다. 그리고 살아돌아가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여자에게 가져가라고 말했다. 여자는 캔버스를 던졌다. 캔버스는 호수에 풍덩 빠졌다. 부글부글, 캔버스 주위에 거품이 일더니 호수가 캔버스를 빨아들였다.

"이제 집에 가."

  여자는 그 말을 하고 난 뒤, 사라졌다. 나는 숲에 뛰어들어갔다. 뛰면서 나는 생각했다. 집에 가면 씻고 자야지. 그리고 내일 무당에게 가보자. 이상한 귀신이 붙었다고, 굿을 해달라고 무당에게 말해야지. 저기 빛이 보였다. 나는 빛을 향해 달려갔다. 계속 어두컴컴한 곳에 있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빛에 나는 찌푸렸다. 빛에 익숙해지고 주위를 살폈다. 깜깜했지만 가로등 때문에 그리 어둡지는 않았고, 가정집과 빌라가 보였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아, 나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 돌아왔다.



3.


    나는 집에 도착했다. 긴장이 싹 가고 안도와 편안함이 찾아왔다. 나는 욕실로 가서 목욕을 하고 나왔다. 온몸을 적신 땀과 먼지를 씻어내니 너무나도 상쾌했다. 나는 머리를 털며 방으로 갔다. 이젤 위에 있어야 할 캔버스는 없었다. 그 모습이 내게 오늘 있었던 모든 일이 현실이라고 선언하는 것 같았다. 나는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렸다. 지금 침대에 누워봤자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자야겠다. 나는 거실로 갔다. 거실은 깜깜했다. 나는 스위치를 켰다. 환해진 전등은 거실을 비췄다. 소파에는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갑자기 온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이완이 됐다.

"안녕."

  A였다. A는 살아있었구나.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A와 나는 동갑인데, 나는 그때보다 키도 컸고, 가슴도 나왔다. 그런데 A의 몸은 그때 그대로였다. A는 단정한 단발머리와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 스타일과 복장은 그날과 똑같았지만, 머리색과 신발을 신고 있지 않다는 점은 달랐다. A의 머리색은 그 여자와 똑같은 붉은색이었다.

"오랜만이야."

  나는 침을 한번 삼켰다. 아직도 끝나지 않았구나. A의 손에는 내가 아까 여자에게 준 캔버스가 있었다.

"이거, 되찾고 싶었니?"

  A는 나에게 캔버스를 보여주며 말했다. 되찾고 싶은 마음은 있었으나, 매우 작은 크기의 마음이었다. 나의 생존이 중요해서 나는 그림을 그녀에게 줬고, 집에 돌아와서는 살았다는 안도감에 그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알아. 네가 이 그림에 크게 미련이 없는 것도."

  A는 내게 캔버스를 내밀었다.

"더 이상 호수 밖에 나오면 위험하지만, 너 보고 싶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나왔어."

  나는 순간 여자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은 호수 밖으로 나오는 안되는 몸이라는 여자의 말.

 "오늘 너와 모래성 만들어서 즐거웠어. 비록 진흙성이긴 하지만."

  아, 그 여자가 너였구나. A.

"나, 그 그림이 완성된 거 보고 싶어. 그래서 돌려주는 거야. 꼭 완성시켜서 나한테 보여줘."

  A는 네 손가락을 접고, 새끼손가락만 핀 손을 내게 내밀었다. A는 그 그림을 꼭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A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A를 끌고 간 이방인들이나, A를 그들에게 판 아버지가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A가 꼭 나 때문에 끌려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때 내가 그들과 맞서싸웠더라면 우리는 모래성을 완성시킬 수 있었을 텐데. 나는 A의 새끼손가락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응. 꼭 보여줄게. A."

  A는 활짝 웃으며 사라졌다. A가 있던 자리에는 캔버스만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