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로 / 새연
잠시 졸았나보다.
어느새 창문 너머로 어둠이 찾아오고 있다. 분명 방금 전의 기억으로는 따사로운 햇빛에 눈이 아플 지경이었는데 말이다. 놓치지 않으려고 오른손으로 꽉 움켜쥐고 있던 펜을 잠시 책상에 올려두고 나는 창문을 응시했다. 너무 집중한 나머지 들리지 않았던 작은 새 소리, 바람 소리가 귓가에 닿는다. 그 순간에 눈을 살포시 감으니 흐릿하게 누군가가 떠올랐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더라, 잘은 모르겠지만 따뜻한 느낌과 함께 내게 다가온다. 하지만 다시 눈을 뜨자 떠오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지금은 잊어버렸지만 그리운 사람인가보다. 그리고 그걸로 전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텅 빈, 게다가 넓기까지 한 집이지만 작업실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용 되지 않는다. 낮에는 모든 방에 햇빛이 들어오니 상관없지만, 가끔 작업에 몰두하다가 밤이 돼서야 밖에 나오면 어두운 집 안 모습에 절로 한숨이 나온다. 터벅터벅 냉장고로 다가가 저녁거리를 찾아보지만 무언가 있을 리가 만무하다. 근처에 놓아두었던 지갑을 들고서 밖으로 향했다. 급하게 얇은 옷차림으로 나왔기 때문일까, 조금은 쌀쌀한 날씨에 양팔을 비비며 텅 빈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찬바람이 볼을 스치는 와중에도 어째서인지 발걸음은 가볍다. 저녁거리를 살 곳은 정해져있는데도 어째서인지 다른 곳을 향해 걷고 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처음 보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운 느낌이다. 아무도 없는 거리인데도 나는 무작정 길을 계속 걸었다. 문득, 집에서 나오기 전 그렸던 그림이 떠올랐다. 그 사람, 풍경을 굉장히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산과 들이 펼쳐진 공간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올 것 같은 개울가도, 이제는 사라져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아주 따뜻한 풍경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리고 내가 그리던 그림을 좋아했다. 방금 전까지 그리던 그림도 그 사람이, 그녀가 좋아하던 그림의 한 종류였다. 그녀가 상상하는 그 풍경을 이야기 해주면 나는 그것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내 옆에서 그것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곁을 떠나는 법이 없었다. 가끔씩 커피와 간식거리를 가지러 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한 사람이 내가 걷던 길을 막아섰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예쁜 옷이지만, 그 옷들을 모두 섞어놓은 느낌의 이상한 옷을 입고 있었고, 얼굴은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 바로 앞에 있는 듯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주 멀리 떨어져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그 사람이 내게 말했다.
“되찾고 싶니?”
나는 그 사람을 지켜보다가 그 사람이 걷는 길을 따라 걸었다. 왠지 그녀가 본다면 좋아했을 법한 호수공원이 눈앞에 있었다. 그 사람은 그 근처에 자리 잡고 앉아서 호수를 향해 돌맹이를 하나하나 던졌다. 나도 그 사람 곁에 앉아 옆에 있던 돌맹이를 집어 던졌다. 시간이 지나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깜깜하다. 달빛을 제외하고는 불빛 하나 남아있지 않다. 아무 말 없이 앉아있던 그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게 그리던 그림을 달라고 한다. 그 말에 나를 살펴보니 주머니 속에 꾸깃꾸깃 접혀져있는 그림이 보였다. 나는 그림을 펴서, 그 사람에게 건넸다. 그 사람은 잠시 그림을 바라보더니, 호수로 다가가 던져버렸다. 수성 펜으로 그려진 풍경화가 물에 번져간다. 곧 종이도 물 아래로 가라앉아버린다.
“집에 가.”
그 사람을 호수에 두고 나는 집으로 향했다. 분명 처음 보는 낯선 길인데, 길을 걷다보니 집이 보인다. 깜깜한 집 내부를 신경 쓰지 않은 채 거실로 향한다. 그곳에는 방금 전 그 사람이, 물에 번져 알아볼 수 없는 그림을 들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제야 알아볼 수 있겠다. 그 사람은, 그 그림을 좋아하던.
“되찾고 싶었니?”
아니, 라고 말하려는 입을 꾹 다문 채 나는 눈물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