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송 / Recover



"어라."

  스윽-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창 밖 너머에는 해가 지고있었다. 분명히 아까 일을 시작할때만 해도 낮이었는데 지금은 벌써 저녁이 되서 천천히 밤이 되가고 있었다. 잠깐 쉴까. 그렇게 생각하고 들고 있던 펜을 놓았다.
  펜을 놓자 펜은 데구르르- 소리를 내며 책상을 이리저리 굴렀고 이내 멈췄다. 굴러간 펜을 잡아다 필통 속에 툭 던져넣고는 기지개를 쭈-욱 폈다. 장시간 굳어있던 목과 어깨가 풀리며 뚜둑 소리를 냈다. 몰려오는 피곤함에 눈을 지그시 감으니 귓가에는 새의 울음소리와 싸늘한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의자를 지익- 뒤로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A. 문득 그가 생각났다. 이제는 흐릿한 기억이지만. 발걸음을 옮겨 거실로 갔다. 불을 켜놓지 않아서 거실은 컴컴했다.

"밥이나 먹을까."

  불을 켜야했지만 정작 키기는 귀찮아 어둠 속을 더듬더듬 걸어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 찬장. 이곳저곳을 살펴봤지만 딱히 먹을 것은 없었다. 하아. 미리미리 사다놓을걸. 집에 먹을 것은 없었지만 배는 고팠기때문에 먹을 것을 사러가기 위해 후드를 집어들고 지갑을 대충 쑤셔넣은채 밖으로 나갔다.

  쌀쌀한 날씨. 후드를 입고 지퍼를 끝까지 채운 채, 어슬렁어슬렁 걸었다. 바람까지 휑하니 부니 더욱 날씨가 춥게 느껴졌다. 최대한 바람이 몸에 닿지 않도록 후드에 얼굴을 파묻었다. 내 발은 마트를 향해 움직였다. 왜인지 모르게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용해서 기분은 좋지만. 뭔가, 너무 조용하네. 그보다 어디로 갈까. 요 앞에 마트? 잠시 고민을 하고 고개를 저었다. 다른 곳으로 가자.
  다른 마트에 가기 위해 걷고보니 어느새 모르는 도시를 걷고있었다. 모험하는 기분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낯선 기분이다. 하긴, 확실히 지금 모르는 도시를 마구 돌아다니고 있으니깐.. 게다가 거리엔 아무도 없고. 이러다 길 잃어버리는 거 아니겠지..?
  아무도 없으니 그저 가만히 걷는다. 노래를 들을 이어폰도 안가져왔던 터라, 그냥 걷고있으니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내가 '펜으로 하던 것'같은.

  그러고 보니, 그거. A가. 응, A가 좋아하던거네. A, 내가 A랑 어떻게 된거더라. 가물가물한데.. 뭐, 중요한 건 아니지만.

"..."

  누가 나타났다. 아, 놀랐다. 갑자기 사람 앞을 턱하니 가로막더니 빤히 날 쳐다본다. 뭐지, 이 사람.

"되찾고 싶니?"

  엥, 뭐를? 이해가 안되는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의 말에 당황하며 그 사람을 빤히 쳐다본다.

"되찾고 싶니?"

  똑같은 물음.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여 그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마치, 당신이 허튼 짓하지 못하게 지켜보겠다는 것처럼. 그 사람은 내 시선은 개의치 않는 듯 똑같이 날 쳐다보며 여전히 "되찾고 싶니?" 라고 물어보았다.

"그러니깐 뭐를요?"

"너의 것을."

"내 것?"

"응, 너의 것."

"내 것을 당신이 가지고 있어요? 왜요?"

"...되찾고 싶니?"

  결국에는 원래의 질문을 돌아왔다, 뭐야 진짜. 일단, 내 것을 가지고 있다니깐. 돌려 받아야겠지.

"네, 되찾고 싶어요."

"따라와."

  나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그 사람은 나에게 말한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간다. 나는 급히 그 사람을 따라갔다. 혹시..이거 인신매매 그런거 아니겠지..? 따라가면서도 속으로는 조금 불안한 마음을 가진 상태로.

"..얼마나 더 가야되요?"

  이 질문만 한 5번은 한 것 같다. 돌아오는 대답은 깔끔하게 한 0번? 아주 가차없이 내 말을 무시하고 그는 걷기만 했다. 어딜 가는 거냐는 질문도 묵묵부답. 당신은 누구냐는 질문도 묵묵부답. 내 것은 왜 가지고 있냐는 질문도 묵묵부답. 이제는 내가 지쳐서 더는 질문할 기분도 생기지 않았다.
  그저 그의 뒤만 졸졸졸 쫓아갔다. 가만히 걷는 것도 질렸어. 이젠 슬슬 한계다.

"아, 얼마나 더 가야되냐구요-!!!"

  소리를 질렀다. 그제서야 그 사람은 손을 뻗어 어딘가를 가리키더니 날 돌아보며 말했다.

"다왔어."

  그가 가리키는 곳은, 호수. 호수? 왜 도시 한복판에 호수가?? 지금 꿈이라도 꾸고 있는건가? 머리 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손으로 볼을 꽈악 꼬집어봐도 분명히 아팠다. 이건 꿈이 아니였다. 그치만 믿을 수 없는걸.

"여기가 어디에요?"

"자-, 같이 놀자."

"..예?"

"놀자고."

"여기서요?"

"응."

"뭐하고요?"

"글쎄, 무엇이든지.. 예를들면, 끝말잇기?"

"...미쳤네. 내 것이나 돌려줘요."

"곧 돌려받을꺼야. 그러니깐 지금은 놀자."

  꿋꿋히 놀자는 그의 말에 어이가 없었지만, 내 것을 돌려받으려면 나에겐 선택권은 없었다. 호숫가 근처에 이 사람과 주저앉아서 그가 말하는 대로 놀기 시작했다. 그냥 이것저것을 하면서. 처음에는 떨떠름 했지만 예상외로 놀다보니 재밌어서 나도 결국에는 열심히 놀아버렸다.
  '아, 이렇게 놀면 안되는데..!' 라고 생각해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하늘은 어둑어둑한 상태를 지나 완벽한 밤이 되어있었다.

"헉, 지금이 몇시야!"

"...아, 재밌었다."

"완전 밤이 되버렸잖아요! 집에 언제가!"

"괜찮아, 금방 가겠지 뭐."

"...지금 본인 일 아니라고 너무 태평한 거 아니에요?"

"그치만 진짠걸."

"하아..됐고, 내 것이나 돌려줘요."

"그럼 그걸 줘."

"뭐를요?"

  그는 내 후드에 달린 주머니를 가리킨다. 주머니? 여기엔 지갑밖에 없는데...지금 금품 갈취하는거야? 뭐야.. 이 사람. 진짜 미친거아냐?

"싫어요. 지금 이거 금품 갈취거든요?"

"아니 그거말고."

"..주머니엔 지갑밖에 없는데.."

  중얼거리며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았다. 맨들맨들한 지갑의 촉감이 느껴진다. 그래, 지갑밖에 없잖아. 아, 아니네? 지갑이랑 다른 것이 들어있잖아..?
...바스락 거리는데..? 주머니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지갑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이건...

"그래, 그거."

  내가 집에서 '펜으로 하던 것'. 이게 왜 여기있지..?

"이걸, 달라고요?"

"응."

"이건 내건데.."

"그거 줘."

".....이거 주면 내 것, 돌려줄거에요?"

"돌려준다고 몇번 말해."

  몇번 말했어도 미심쩍은 걸..게다가 이건 나한테 중요한 거라고..
많은 고민을 했다. 이걸 줄까, 말까. 이걸 주면 내 것을 되찾지만 이걸 뺏기는거잖아..그치만 안주면 이걸 가지고 내 것을 빼앗기는거고. 최대한 합리적인 선택을 하려고 끊임없이 머리를 굴린 끝에 결정을 내렸다.

"자요."

  손에 들고 있던 '펜으로 하던 것'. 그것을 그에게 건내주었다. 그는 그것을 받아들고 가만히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말없이 그저 쳐다보기만 했다. 뭐랄까..평가받는 기분이야. 괜시리 드는 민망감에 그의 손에서 그것을 뻿으려들었다.

"이제..돌려줘요..!"

"...."

  그는 내 손을 이리저리 피하며 끝까지 그것만 응시하더니 이내 그것을 호수에 던져버렸다. 그래. 던져버렸다. 아주 한 치의 미련도 없이 내 노력의 산물을 던져버렸다. 그가 던진 물에 취약한 내 노력의 산물은 호수의 물에 의해 푸욱 적셔져서는 이내 흐믈흐믈해졌다. 그리고는 가라앉았다. 완벽하게. 마치 그것이 호수에 던져진 적 없다는듯이.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

"내가, 내가 얼마나 힘들게 한건데!!"

"..."

"아니, 뭐라고 말 좀 해봐요!"

"..."

  치밀어오는 분노에 그를 노려보며 바락바락 소리질렀다. 그렇지만 그는 이번에도 입을 꽉 다문 채, 그저 날 쳐다만 볼 뿐이었다.
하, 기운이 빠진다. 반응이 없는 그를 마주하자 화를 낼 기운조차 사라져서 이제는 말하기조차 싫었다.
나도 입을 다물고 그를 쳐다봤다. 그와 나 사이에는 침묵이 흐르고, 서로를 향한 시선만 이어졌다.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입을 먼저 연 것은 그였다.

"집에 가"

"뭐라구요?"

"집에 가라고. 이젠."

"내..내 종이는요?"

"..."

"게다가 아직 돌려주지도 않았잖아요, 내 것."

"아니, 넌 돌려받았어. 그러니깐 돌아가."

  그는 단호하게 말하며 손으로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로 가."

"이봐요, 지금 나 아무것도 못받았거든요? 돌려받긴 뭐를 돌려받아요."

"저기로, 가"

"..이봐요..!"

"잘가."

  내 말은 싸그리 무시한 채, 그는 나에게 작별인사를 건냈다. 그에게 떠밀리듯이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내내 그의 행동에 잔뜩 화가 나선 발을 쾅쾅 굴렀고 그를 향한 분노로 침착한 사고가 되지 않았다. 그저 발길가는대로 걸어갔다. 한참을 걸어 화가 좀 가라앉으니 그제서야 침착한 사고가 되기 시작했다. 일단, 움직이던 발을 멈추고 여기가 어딘부터 살펴봤다.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거리는 분명 처음 걷는 낯선 거리였지만 이 길의 끝에는 집이 나올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랬기에 터덜터덜- 집을 향해 걸어갔다. 역시나 길이 걸어가니 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집이다..! 빨리 들어가서 쉬자.."

  후다닥-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집에 들어가니 집엔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아있었다. 불..켜야되는데..모르겠다..이따가 하자. 갑자기 밀려오는 피곤함에 거실로 향했다. 쇼파에 좀 누워야지.. 쇼파로 몸을 다이빙하려고 쇼파 근처로 다가가니 누군가 쇼파에서 몸을 일으킨다. 집에..누가 있다..? 뭐지? 뭐지? 설마, 강..강도?

  누가 있다는 무서움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어,어떻게 해야하지.. 경찰! 경찰에 신고하자..! 더듬더듬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찾았으나 휴대폰은 없었다. 아, 안가져나갔었지..! 휴대폰은 방 안 테이블 위에 놓고 나갔다왔다는 것이 그제서야 기억이 났다. 어쩌지?!

"..."

  자리에서 일어난 이는 나한테 손을 뻗어왔다. 때리려나봐!

"으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행동은 없었다. 그제서야 한쪽 눈을 슬그머니 뜨며 상황을 살폈다. 상대는 손을 내 코앞에서 멈춘 채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안. 놀랐어?"

"누구세요?!!"

"나야. A"

"A..?"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A . 진짜 A다.

"너, 너가 여기에 왜..!"

"이거."

  그렇게 말하며 A는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나에게 보여줬다. 그것은 아까 남자가 호수에 빠트린 나의 '펜으로 하던 것'. 분명 호수에 빠져서 아주 깊은 물 속으로 가라앉았었는데 A가 손에 들고 있는 나의 것은 마치 물에 빠진 적 없다는 듯 멀쩡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이걸 너가 어떻게?"

"되찾고 싶었니?"

  A의 말에 머리 속에서 방금까지의 그 남자와 만나서 있었던 일이 영화가 상영되는 것처럼 촤르륵 지나갔다. 작은 머리 속 영화관의 영화 상영이 끝나고 A와 나의 시선이 교차하자 나는 깨달았고 A에게 말했다.

"A. 너가 그 남자였어?"

  A는 내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