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서 나에게 / 반달
만년필이 드리우는 그림자의 길이가 길어진다. 창밖의 태양이 점점 붉게 기우는 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오늘도 한 글자도 적지 못한 건가.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쾌청한 여름날이었는데, 어느새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는 어둠이 다가와 있었다. 새들은 밤을 맞이하려는 듯 하루의 마지막 노래를 지저귀었고, 여름밤바람은 열린 창으로 들어와 머리카락을 간지럽히고 갔다.
나는 만년필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구겨서 던져버린 종이들이 발치에 채였다. 갑자기 짜증이 밀려와서 화풀이라도 하는 듯 발길질을 하니, 그 중 하나가 방을 가로질러 책장 앞으로 굴러갔다.
책장 밑에는 왜인지 네가 먼 옛날 나에게 줬던 편지가 담긴 파일이 떨어져있었다. 나는 그것을 주워 제자리에 꽂아놓고서는 거실로 나왔다.
거실에서 나를 맞아주는 것은 어두움뿐. 더 이상 우리의 집에 너는 없다. 네가 사라진지도 몇 년인데, 나는 아직도 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나보다. 때 늦은 저녁을 먹을려고 냉장고를 뒤졌지만 아무것도 없어서 나는 결국 지갑과 얇은 외투를 챙겨서 거리로 나섰다.
한여름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아직 가을이 오지는 않았는데 밖은 쌀쌀했다. 얼굴로 불어오는 바람에서 온기는 느낄 수 없었다. 나는 오늘도 끝내지 못한 소절을 생각하면서 천천히 길을 걸었다. 골목길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 골목길을 나는 혼자 배회하고 있었다.
그때 저 앞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였다.
고개를 들어 그곳을 바라봤을 때는 이미 아무것도 없었다. 고양이었나. 그곳에 가까이 갔을 때도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덕분에 길을 놓쳐버려서 늘 가던 마트 말고 옆 동네 마트로 향하게 되었다.
뭔지 모를 위화감이 든 것은 우리 동네에서 꽤 많이 멀어진 이후였다. 주변은 아까보다 조금도 어두워지지 않았고, 공기에는 묘하게 몽환적인 느낌이 감돌았다. 게다가 오늘따라 유난히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도 없는 듯했다.
이 상황이 마치 나와 같았다. 시 한 소절을 쓰지 못해 느끼고 있는 광장에 혼자 놓인 듯한 갑갑함. 네가 사라진 이후로 줄곧 느끼고 있던 감정이 극대화 되는 느낌이었다. 너라면 이런 감정을 가지게 되면 어떻게 했을까. 아니, 네가 이런 감정을 가질 상황에 놓일 리가 없겠구나... 그리고 든 생각. 보고 싶다.
울적한 기분에 침식되어가려는데 누군가가 내 앞에 멈춰 섰다. 집을 나선 뒤 처음 마주친 이 사람은 온통 검은 옷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작았다. 마치 작은 아이 같이.
“보고싶어?”
그 사람이 물어온다. 낯설지 않은 목소리였다.
“되찾고 싶어?”
역시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나는 검은 후드로 가려진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았으나, 얼굴을 제대로 보기도 전에 그는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조금씩 멀어져가는 것을 바라만 보았다. 내가 가만히 서있자 그는 한참을 걸어가더니 뒤를 돌아 나를 바라봐다.
“안 따라 올 거야?”
그는 마을을 가로질렀고, 나는 그의 뒤를 쫒았다. 작은 체구였지만 어째서인지 그의 발걸음은 내가 쉽게 따라가기에는 너무 빨랐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꿈을 쫓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제아무리 달려가도 내 앞에서 더 빨리 뛰어가는 듯 한 존재.
그가 호숫가 앞에 멈춰 섰을 때 나는 거친 숨을 허덕이고 있었다.
그제서야 그는 후드를 벗고 나를 돌아봤다. 익숙한 너의 얼굴에 나는 숨이 멎는 듯했다.
“너...”
“줘.”
다짜고짜 너는 나에게 달라고 그런다. 무의식적으로 나는 주머니로 손을 가져갔고, 주머니에는 아까 적고 있던 것이 들어있었다. 아까 적고 있던 가사를 건넸다.
너는 가사지를 받고 한번 훑더니 그대로 그것을 호수에 던져버렸다.
종이는 바람을 타고 호수 한가운데에 앉더니, 이내 물기를 머금고 가라앉아 버렸다.
“집에가.”
나는 너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집에 가서 내가 쓴 편지를 읽어. 그리고 저런 가짜 말고 진짜를 적어”
어떻게 집에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걷다보니 눈앞에 집이 나타나있었다. 나는 집안에 들어갔다. 집안에는 네가 기다리고 있었다.
거울 속에서.
네가 보낸 편지를 다시 읽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안녕, 미래의 나? 나는 지금 학교에서 시켜서 이걸 쓰고 있어. 그래도 한번 제대로 써볼게. 나는 지금 꿈과 희망을 전하는 작사가가 되고 싶어. 작사가니까 시를 써도 좋겠지. 그걸 위해서 나는 열심히 나 자신의 꿈과 희망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겠어. 너도 노력하고 있겠지? 흐음.. 뭔가 미래의 나니까 존댓말을 해야 하나.. 어쨌든 너도 노력하고 있길 바라! 난 노력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편지의 뒷면에는 두어 줄의 글귀가 적혀있었다. 아까 호수에 가라앉은 글이었다.
달라진 점이라면 어릴 적 나의 글씨체로 적혀있는 짧은 문구.
[되찾고 싶니? 네 꿈과 희망?]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게 가능하면 진작에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때, 기적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의 목소리, 아니. 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널 믿고 너에게 행복을 허락해. 아까 나를 쫓았던 것처럼 다시 우리의 꿈을 향해 달려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