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란제
하늘을 바라봤다. 아니, 바라본 곳에 하늘이 왔다. 물감이 스며들 듯 점점 색이 주홍빛으로 바래갔다.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그런 시간마저 줄 수 없다며 약 올리듯 금방 주홍빛 물을 머금는다. 그런 시비에도 손에 들린 펜의 끝을 종이에 들이밀었다. 서걱서걱하는 소리가 혼자 울렸다. 무언가의 글이 아닌 불규칙한 직선의 나열이 펜 끝에 남았다. 잉크 번진 종이는 금방 못 쓰게 되어버린다. 더 이상 못 쓸 종이를 흔들자 위에 남은 잉크 한 방울이 나무 책상 위로 떨어져 스며든다.
아아, 얼룩 생기겠네. 급히 손으로 훑어 보았자 닦이는 것은 없다. 그에 그것을 빤히 쳐다보다 반 지하 벽의 틈에 난 창을 쳐다본다. 금방 떨어트린 잉크 마냥 검은 빛이 돌고 있다. 어차피 오늘 글은 끝이겠네. 손에서 펜을 놓는다. 얇은 깃펜은 소리도 없이 책상에 추락한다.
그 때, 새 소리가 난다. 이미 밤은 늦었는데 무얼 찾기라도 하는 걸까. 그 새에게 대답하듯이 바람이 휙 지나간다. 그것이 지나가며 나뭇잎이 소리를 지른다. 책상 다리를 발로 밀어 느릿하게 일어섰다. 그리고 그 탓에 책장 위에 걸쳐진 수첩이 톡하니 떨어진다. 그 위에는 나의 이름과 누군가의 이름이 함께 쓰여 있다. 그러고 보니 그런 놈이 있었지. 어릴 때는 제법 친했던 친구였다. 지금은 잘 살아있나.
“진짜 오늘은 망했네.”
이미 잡념으로 가득 차 버렸으니까. 방문을 발로 찼다. 불이 켜지지 않아 안이 깜깜하다. 그제야 자신이 지금 아무것도 먹지 않음을 깨달았다. 십년은 쓴 것 같은 냉장고를 열자 안에 있는 것은 물과 밑반찬 정도였다. 어차피 비워야할 머리라면 잠깐 사러 다녀올까. 대충 던져둔 가디건을 걸치고 발에 슬리퍼를 끼운 채로 현관문을 연다.
시원하다. 조금은 차갑다, 하지만 차라리 지금은 이게 더 나을 것이다. 나뭇잎을 건드리던 바람이 천조각 사이로 들어온다. 아스팔트 위에는 누구의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는다. 그에 안도감을 느낀다. 편의점이라도 갈까? 그러나 왜인지 가고 싶지 않다.
무턱대고 걷는다. 옆 동네다. 이곳에 오고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다. 항상 빛도 안 드는 방에서 글 쓰는 것이 내 일과였으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차라리 여기서 다른 곳으로 가버렸으면, 그럼 좀 나아질까. 앞만 보고 걷는다. 앞, 앞, 앞.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는 거리 위에서 한 소녀가 서있다. 소녀의 곁에는 한 소년이 서있다. 소녀는 그를 보고선 싱긋 웃어 보인다. 그는 그런 소녀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그 아이들은 분명 방금 전에 내가 쓰던 것의 일부였다. 내 이야기의 작은 주인공들. 그리고 소녀에게 내가 다가가자 그 아이는 날 보고 혐오스러운 듯 쳐다보다 스쳐지나갔다. 사라져버린다. 남겨진 소년은 날 보았다. 그리고 그 얼굴이 내 수첩, 아니 우리 수첩에 남겨져 있던 너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예전 어느 날에 내가 아이였을 적에 난 그 아이에게 “안녕.” 이라고 말했다. 사실은 기뻤다. 난 어째서인지 늘 네가 무서웠다. 넌 내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장 알 수 없는 두려움을 주는 존재였다. 넌 늘 나와, 혹은 다른 누군가와도 달랐으니까. 난 네게 작별을 말할 때, 내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렇구나, 난 이걸 쓰면서 너와 날 보고 있었구나. 허탈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네. 피식 웃어버린다.
“되찾고 싶어?”
그제까지 울던 소년은 사라지고 얼굴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그리 물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데도 웃고 있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늘거리는 망토 같은 옷이 계속 내 시야를 가린다. 그게 몹시 이질적이라 꿈이라는 생각을 해버린다.
‘얼굴을 알 수 없는 너’는 나의 손을 잡고 달려갔다. 그에 이끌리듯 따라간 곳에는 호수가 있었다. 검은 빛을 보이고 있는 호수에는 몇 없는 별만이 떠있었다. ‘너’는 장난치듯 모래알을 퍼 올렸다. 네 얇은 손가락 새로 반짝이며 빠져나가 물속으로 그것이 가라앉았다. 그걸 따라하자 내가 잡은 모래알은 검은색으로 변해 빠져나간다.
지금은 새벽인지 아무 빛도 널 보여주지 않는다. 그에 그냥 주저앉아버린다. 넌 내게 주머니 안의 것을 요구 했다. 그 안에는 알 수 없지만, 돌돌 말린 원고지가 들어있었다. 난 너에게 그것을 건넸다. 넌 그것을 한참 바라보다 신경질적으로 뭍에 내던졌다. 하얀 원고지 속의 검은 색 잉크들이 사라진다. 점점 검은 색으로 변해버린다. 고개를 들자 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
떠밀리듯이 호숫가를 벗어났다. 고개를 돌려봐도 그곳을 벗어난 내 시야에 너는 보이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내가 이것 밖에 걷지 않았던가? 전혀 모르는 흙길 끝에서 생각보다 빨리 도착한 내 집에 이질감을 느낀다.
지쳐버린 나는 불도 켜지 않고서 거실에 들어섰다. 피곤해, 아무 것도 모르겠어. 그 위의 소파에 몸을 누이려 하였지만, 그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곳에는 내 옛날의 친구이자 내 글의 주인공인 네가 서있었기에. 너의 손에 들린 것은 검은색으로 변해버린 내 원고지였다. 그리고 넌 웃으며 물었다.
“되찾고 싶었어?”
너였구나. 혹시 나에게 벌을 주기위해 찾아온 거야? 네 손에 들린 검은 원고지 마냥 내 기억은 사라져버렸다. 그걸 말해주러 온 거야? 나는 네 손의 원고지를 잡아 조각조각 찢어버린다. 이제 그건 필요 없어. 내게 넌 없는 사람이니까. 나는 이번에도 너의 손을 매정히 내쳤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