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오랜만에 글을 쓰기 위해서 펜을 들고 종이에 낙서와 짧은 토막 글을 쓰며 뭘 쓸까 고민하다가 결국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한동안 보지 못했던 네가 꿈 속에 나타나 겨우 잊어가던 너의 존재감을 일깨우고 사라져버렸다. 네가 사라져버림과 동시에 꿈에서 깨어나버려 무척 아쉬움을 느끼며 눈을 뜨자마자 얕은 탄식을 내뱉고는 드디어 펜을 들고 목적성이 분명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지 않고 한동안 심취해서 글을 쓰다 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아까까지는 낮이었는데…….”

  너와 관련된 일이면 항상 시간감각이 사라진다. 씁쓸하게 웃으며 주황빛으로 물들어가는 방 속에서 펜의 잉크 색 마냥 변해가는 밖을 보며 새의 울음 소리와 바람 소리를 귀에 담았다. 소리가 잦아들자 나는 펜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를 상상과 꿈의 세계가 아닌 곳에서 본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새삼 손가락으로 꼽아보았다.

너를 볼 확률이 지금 창 밖처럼 깜깜할까
아니면 지금 서서히 떠오르는 별처럼 밝을까

  고민에 빠져있는 동안 발은 나를 거실로 옮겨놓았다.

“깜깜하네”

  저녁을 먹어야겠다 싶어 냉장고를 뒤졌다.

“비었네……”

  중얼중얼거리며 외투를 챙겨 입고 밖을 나섰다. 간단하게 먹을 거리를 사야겠다 싶어 근처에 봐둔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길을 걷는 동안 나는 길에서 아무도 발견할 수 없었다. 계속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나는 항상 걷던 거리를 걷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오늘을 오랜만에 너를 떠올리게 된 날이니 좀 더 특별해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뒤를 돌아 왔던 길을 지나쳐 처음 보는 골목 안으로 들어가 보고 처음 보는 가로등의 빛을 받으며 발을 움직였다.

  하늘도 땅도 나 자신도 새로워 보이는 곳에 멈추어 섰을 때 나는 처음 보는 도시에 정신을 빼앗겼다. 처음 보는 건물, 보지 못했던 차들이 나를 스치듯 지나간다. 하지만 눈에는 익숙지 않은데 느껴지는 추억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아직도 너를 생각하고 있는 걸까
아직도 추억에 잠겨 있는 걸까
나의 시간은 네가 사라진 이후에 멈춰버린 걸까
그래서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걸까

  혹시라도 너와 함께 왔던 곳일까 싶어 주변을 꼼꼼히 살피는 와중 왜 사람이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걸까? 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잠시 멈춰 서서 생각을 정리하는 와중에 잠시 내가 쓰던 글이 떠올랐다.

너와의 추억을 새겨 넣은 글이다.
없어진 너의 환상이라도 붙잡기 위해 쓴 글이다.
네가 두고 간 내 옆 빈자리를 다시 한번 직시하고 절망을 잉크 삼아 쓴 글이다.

  다시 떠오른 네 생각에 나는 절망과 혹시……라고 시작하는 희망에 동시에 물들어감을 느끼며 현실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시작된 생각은 댐이 부서진 듯 다른 생각들을 잠식시켰다.

“저기”

  귀에 들어온 목소리가 고막을 두드리며 날 불렀다. 특이한 복장, 의도적으로 가린 듯한 얼굴이 나의 경계심을 고취시킴과 동시에 약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되찾고 싶은 거지?”
“그게 무슨……”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움직이며 나를 향해 손짓하는 그를 결국에는 쫓아가게 되었다.

“어디로 가는 거야!”

  중간에 참다 못하고 질러버린 소리는 나무들의 잎사귀가 하늘과 함께 가려버렸고
앞서 가는 사람의 등에 고정시킨 시선은 어둠에 먹힐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움직였다.

  앞에 가던 사람이 발을 멈추자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숨소리도 모두 사라지고 호수의 물결만 주위를 흔들고 있었다. 달도, 나무도, 호수 근처에 앉아 있는 사람도 호수 안에서 일그러지고 있었다. 차오르는 숨도 주변이 조용해지자 덩달아 차분해져 버렸다.

  호수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던 사람에게 다가갔다. 검은 색 말만이 움직여져 있는 체스 판이 보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하얀색 말들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들을 어찌 움직일지 고민하는 나를 잠시 응시하더니 크게 반응하지 않고 내가 움직이는 말들을 방어하기도 하고 공격하기도 했다.

  마치 내가 오는 것이, 여기에 도착해서 그와 체스를 두는 것이 정해진 일이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흘러갔다. 달빛마저 구름에 가려져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다시 빛을 잃자 나는 체스가 끝나고 일어나 있던 몸을 다시 바닥에 앉혔다.

“펜으로 하던 것 줘”

  나의 어깨를 톡톡 치더니 나의 것을 당당하게 요구해 오는 어둠 속의 한 사람은 내 앞으로 자리를 옮기고 손을 내밀었다.

이걸 주면 너를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너를 잊고 싶은 걸까.
이건 내 무의식일까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가 원하는 것을 손에 쥐어주었다. 어둠 속에 멈춰있던 손은 종이를 쥐자마자 호수 쪽으로 움직이더니 나의 소유물이었던 것을 물에 가라앉혀버렸다.

  나는 나의 것을 가져간 사람의 얼굴이 있을 만한 곳을 응시했다. 나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허탈한 듯이 가만히 자리에 서서 시선만을 움직였다. 시선이 얽히는 느낌이 든다.

  나는 누군가를 누군가는 나를 쳐다보고 있다.

“이제 집에 갈 시간이야”

  나는 그 말에 자다 깨어버린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버렸고 무언가 물어보려 했지만 나는 입을 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배고픔, 허탈감, 안도감, 부정적인 감정이 머리를 야금야금 차지하도록 내버려두고 발을 열심히 움직여 낯선 길에서 나를 구해내었다.

  불이 꺼진 채로 나를 기다리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둠이 익숙해졌는지 불을 킬 마음이 들지 않는다. 위치에 익숙해진 가구들을 피해 거실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존재감이 어둠 안에 숨어 나를 뒤흔들었다.

“뭐야……?”

  내가 결국 포기해버린 종이가, 네가 내 눈 앞에 서있었다. 

“날 되찾고 싶었던 거 맞지?”

  어둠 속에서도 나의 추억은 빛났고 나는 가까이 다가가 내 존재의 모든 것을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