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홍


 분홍색, 다홍색, 남색 등 형형색색을 띠며 하늘이 물들어 가는 것은 내 시선을 빼앗을 만했다. 시작했을 때만 해도 높게 떠있던 해인데 시간이 한참 지났다는 것을 알리듯이 이미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해와 멀리 떨어진 곳부터 검게 물들기 시작한다. 손에 들려있던 볼펜 뚜껑을 닫고 일어서 창밖으로 다가가 좀 더 자세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소리뿐만 아니라 바람 소리에 섞여 들어오는 새소리도 지쳐버린 마음에 안정을 찾아주기에 충분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들을 정리하며 어딘가에 꽁꽁 묶어두고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그 사람을 떠올렸다.
"내가 정신이 나갔지." 
 다시 그 사람을 지워야겠다. 차가운 물 한 컵을 마시기 위해 거실로 나갔지만, 항상 둘이 같이 지내왔던 이 공간에는 어둠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꼬르륵- 적막을 가로지르는 허기진 소리가 들린다. 냉장고를 열어 뒤져보지만 비어있는 냉장고는 차가운 공기만큼 허기를 더욱더 지게 만든다. "편의점이라도 다녀와야지. 이러다 굶어 죽겠네."
 문을 쾅- 닫고 의자에 걸려있는 외투를 챙겨입고 지갑 안에 있는 금액을 확인하고 난 뒤에 집을 나섰다. 옷 틈 사이로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바람이 한기를 느끼게 한다. 빠앙-하고 시끄럽게 울려대는 소리에 고개가 자연스럽게 돌아가지만 이내 다시 걸어가는 길로 시선을 다시 돌렸다. 반짝이는 간판- 편의점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재빠르게 달려가 열어보려 했지만, 문은 굳게 잠겨 열리지 않았다.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붙여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화장실이라도 간 걸까- 아르바이트생은 보이지 않았다. 아하- 깊은 한숨만이 나온다. 좀 더 멀리 떨어져 있는 편의점, 집 근처에서 본 다른 식당 등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곳을 떠올리지만, 이 허기진 배를 채우려면 '그 곳'만이 계속 떠올랐기에 발걸음을 옮겼다.

 멍하니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처음 보는 간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분명 동네 근처였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처음 보는 것들로만 눈앞에 가득했다. 아는듯하면서 모르는듯한, 마치 아는 그 누구도 없이 홀로 이곳에 떨어진 듯한 기분이 든다. 주변에 소란스러운 소리가 잔뜩 들려오지만 내 눈에는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비워져 있던 머릿속에는 아까까지 쓰고 있던 글의 구절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문장들은 길게 연결이 되었고 길게 늘어진 문장들을 쫓다 보니 어느새 이어지던 기억은 그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그와 손을 잡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같이 하고 있었다. 마치 나의 일부분인 것처럼-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이어지던 기억들은 천천히 지워지고 있었다.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아무도 보이지 않는 거리 저 멀리서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터벅- 터벅- 딱 봐도 이곳, 이 거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복장을 하는 사람이었다. 깊게 눌러쓴 모자 탓에 얼굴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던 터라
"누구세요?" "되찾고 싶니?"
 아주 이상한 질문만을 던지는 사람이었다. 나는 무엇을 되찾고 싶은 걸까- 나는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따라오라는 손짓을 보고 그 사람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우리 둘 사이에서는 그 어떤 말도 맴돌지 않았고 적막만이 흐르고 있었다. 걸음이 멈춘 곳은 한 호수공원. 호수 근처에 다다르자 조용히 손을 호수 안으로 뻗어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근처에 떨어져 있는 나뭇잎을 호수에 띄어 보내기도 하고 작은 돌멩이를 던지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놀이를 하는 그 사람의 모습을 여전히 바라만 보거나 종종 장단에 맞추어 같이 놀기도 하였다. 놀이를 끝냈는지 호수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은 뒤 "이리 와서 너도 앉아."라는 말에 어떻게 할까 봐- 고민을 했지만 "어서."라는 말에 재빠르게 옆으로 가 앉았다. "네가 아까 펜으로 하던 것들. 나에게 줘." 대체 무엇을 돌라는 거지?
"주머니 안에 있을 거야."
 마치 알고 있다는 듯한 말에 반신반의하며 외투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어보자 마법처럼 원래 들어있었다는 듯이 한 종이 뭉치가 나왔었고 한 장 한 장 넘겨보자 집에서 내가 적고 있던 문장들이 뒤섞여 적혀있었다. 종이 뭉치와 그 사람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자 "맞아 그거야."라며 건네 돌라는 듯이 손을 뻗었고 나는 그것들을 건네주었다. 만족스럽다는 듯이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한참을 읽던 그 사람은 벌떡 일어나더니 호수 근처로 다시 걸어가 호수 위로 던져버렸다. 놀라 벌떡 일어난 뒤 호수로 뛰어갔지만 하얗게 밤하늘은 수놓았던 종이들은 하나하나 호수 위로 흩어졌고 이내 천천히 물에 녹아버리듯이 가라앉았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불만 섞인 목소리로 그 사람을 노려보았다. 그 사람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느껴지는 기분은 마치 그 사람이 미소를 짓고 있는듯한 기분이었다. 그 사람은 공원 입구를 손으로 가리켰다.
"집에 가." "제가 왜 집에 가야 하는 거에요?"
 나의 말에 그 사람의 표정이 굳어가는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집에 가." 단호한 그 사람의 말투에 나는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뒤돌아보았지만, 그 사람은 내가 공원을 나설 때까지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을 두고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허기졌던 배는 더는 배가 고프지 않다는 듯이 조용했고 처음 보는 길을 걷고 있었지만 나는 마치 이 길을 알고 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길을 찾아갔고 그 길의 끝에는 집이 있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이 열리자 불을 켤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곧장 거실로 발걸음을 향했다. 피곤한 몸을 소파에 맡길 생각으로 향한 거였지만 이내 그 생각은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깜깜한 거실, 소파에 몸을 기대어 앉아있던 그는 나를 발견하고는 미소 짓고 있었다. "늦었네."라는 말과 함께 건넨 하얀 종이 뭉치들. 분명 아까 호수에서 그 사람이 던져버린 것들이었다. 급하게 받아들고 안에 내용을 확인해보니 아까 호수에서 읽었던 내용과 똑같았다. 분명 물 녹듯 사라졌던 종이들이었지만 마치 물 근처에는 가지 않았던 것처럼 마르고 본래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멍하니 종이만을 바라보자 그는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되찾고 싶었니?" 마치 내가 되찾고 싶었던 걸 알고 있는 듯한 그. 이상한 복장을 하고, 나에게 따라오라고 하고, 각종 장난을 치거나 이 소중한 종이들을 물 위로 수놓듯이 던져버렸던 그 사람은 내가 생각하던, 내가 떠올리던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