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 lycoris



  깜빡, 깜빡. 그리고 깜빡. 아니, 끔뻑. 퍼석하니 메마른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뜬다. 멀고 먼 하늘이 하얗고 파랗다가, 노랗다가, 불그죽죽하다가, 거무스름하다가, 결국은 보랏빛이 돌도록 컴컴해질 동안. 본드로 붙여놓은 것처럼 한 자리에 앉아서, 내가 하는 거라곤 그렇게 기계처럼 눈꺼풀만 들었다 놓는 일 뿐이었다.

  시간이 참 빨라, 꼭 그런 생각은 무엇 하나 해낸 것 없이 하루가 저물 즈음에 들더라.

  생각이란 걸 하면 우울해지는 날이 이따금 찾아오는데, 그게 오늘인 것 같아 잠시 핸드폰을 보았다. 전화를 걸고 싶기도 하고, 문자를 보내보고 싶기도 하고, 당장 무슨무슨 어플을 켜 기차표를 예매하고 싶기도 하고……. 향수(鄕愁)와는 그리 친하지 않은 나도 가끔은 지치고, 가끔 집이 생각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아, 별로다.


  변명처럼 여태 쥐고 있던 펜은 던지듯 내려놓는다. 까맣게 글씨만 가득한 책도 덮어버린다. 날 선 글씨만 빼곡한 종잇장은 대충 접어 주머니에 넣는다. 깝깝하니 닫아 놓았던 방 창문을 한 겹 열어젖힌다. 반투명 창 하나를 걷어냈을 뿐인데 눈이든 귀든 온갖 게 트인 듯 바람에 흔들리는 창틀과, 유난히 날카로운 새 울음소리가 내 몸으로 스민다. 끈질기게 붙들고 있던 것들을 전부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좀 쉬자, 생각하는 순간 문득 희미한 인영 하나가 뇌리에 떠온다. 대수롭지 않게, 지저분한 낙서를 지우듯 그 잡념을 밀어내며 걸음을 옮긴다. 어느새 컴컴한 밤에 먹혀버린 복도를 지나 밖으로 나간다.

  배는 고프지 않지만 무언가 먹겠다고 짐짓 다짐을 한다. 방에 기껏 사다 놓은 며칠 분의 시리얼이나 우유는 모르는 체한다. 생활비 남겨서 적금도 부어야 하고, 무슨 참가비도 내야 하고, 곧 책도 몇 권 사야 하고……. 어디 가서 돈 쓰지 말고 있는 걸 먹어야 하는데, 가끔은 괜히 그러기 싫은 날도 있는 법이니까.

  깜깜한 밤 선선히 부는 바람에 가볍게 팔짱을 끼고 느긋하게 걷는다. 한적한 길을 따라 값도 싸고 제법 먹을 만한 가게 몇 개를 지나도록 걷고 걷기만 반복한다. 결국은 알 만한 가게를 다 지나쳐서, 더는 뭔가 먹고 싶다는 생각마저 잊혀지도록.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수록 거리는 낯설어진다. 두 다리로 갈 수 있는 거리에 온갖 것들이 빼곡한 도시라, 그저 밥 한 끼 먹으려 첫 발을 뗀 것 뿐인데 어느새 생판 모르는 길을 방황하고 있다. 헛헛한 웃음이 새어나오고, 어쩐지 조금 들뜬다. 표류. 어릴 적 15소년 표류기를 읽으며 덧없이 꿈꿨던 정처없는 여정이 지금 내 발 끝에 와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내 상상을 도우려는 듯 여전히 적막한 길에 타박타박, 투명한 족적을 떨군다. 주머니에 손을 꽂아 삐뚤게 접힌 종잇장 끝을 쓸어보며 정신 사납게 휘갈겨 놓았던 공학수학 과제의 풀이를 생각한다. 웃긴다. 한동안 막혀있었던 풀이가 머릿속에서는 차근차근 쓰여진다. 결국에는 마지막 보던 그 문제의 답까지 떠올리고 만다. 한 줄 한 줄 늘어놓은 풀이과정의 끝에, 숫자와 함께 뭉게 버린 낙서처럼, 부연 얼굴이 하나 피어오른다.


 야.

  그 한 마디에 곧잘 눈을 마주치곤 했던, 퍽 앳된 그 얼굴이다. 친구? 한때 잠시는 좋아한다 따위의 형용사를 붙일 수도 있었던. 왜 하필 복잡한 수식 끝에서 네 얼굴이 피었나, 잠시 고민한다.

  너와는 문제를 풀었다. 심하게 반항하기에는 용기가 부족했으며 점수라는 걸 완전히 외면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못했던 평범한 학생이 모두 그랬듯이. 너와 문제를 푼 것이 아니라, 문제를 풀어야 했던 때 네가 내 옆에 있었다고 하는 것이 더 옳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지나간 어릴 적이 특별히 후회되는 건 아니지만 이따금 이렇게. 이런 종류의 인과관계를 헷갈려하는 내 모습을 깨달을 때면 조금 씁쓸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발은 툭, 툭. 손은 휘익, 휙. 헐렁헐렁 휘적이듯 나아가는 동안 머리는 데굴. 온 구석이 따로 노는 듯한 기분에 젖을 때 쯤 휑하니 뚫려있던 앞길이 턱 가로막힌다. 벙거지 같은 천 조각을 눌러쓰고, 30년대 서부영화에서나 볼 법한 옷을 입은 남자가 있다. 사막 먼지 냄새가 날 것 같은, 꼭 그런 폼으로 서서는 꿈쩍도 않는다.


“다시, 찾고 싶나.”

 남자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문득, 해버린다. 사람은 사람이겠지만, 진짜 사람은 아닐 거라는. 그런 조금은 이상한 생각을. 환영을 보는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 이 낯선 이와의 조우가 차라리 덜 껄끄러워진다. 가타부타 답은 않고 자신을 조금 피해 다시 걸음을 내딛는 나를 따라 남자도 움직인다. 살짝 엇박으로 떨어지는 두 가지 발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까닥인다.

 걸음은 물가에 이르러서야 멎는다. 낯설었던 길만큼 이 도시 속에서 물의 존재란 내게 새롭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남자와 까맣게 일렁이는 물을 앞에 두고 슬그머니 마주선다. 아무 말도, 접촉도 없이 가벼운 손짓만 몇 번 오간다. 내가 뭘 말하는 건지는 저쪽이 모르고, 저쪽이 뭘 표현하려는 건지는 내가 모르지만. 상관없다. 갓난애들이 저들끼리 버둥대며 노는 모양새처럼, 다 큰 어른 둘이 뻣뻣하게 선 채 그렇게 손장난만 친다. 호수 한 가운데에 달이 잠기고, 손가락이며 손목 께가 뻐근해져서야 장난을 그만두고, 물가에 적당히 자리를 잡아 앉는다.

  옆에 다가와 앉은 남자가 말없이 손을 내민다. 뭘? 역시 말로 묻는 대신 가만히 그림자에 가린 남자의 얼굴을 본다. 여전한 침묵 속에 남자는 손을 한 번 까닥, 한다. 달라고, 뭘 달라고. 한동안 눈만 깜빡이다 주머니를 뒤적여 구깃한 종잇장을 내민다. 기다렸다는 듯 종이를 채어 간 남자의 손이 호선을 그렸다. 종이는 날 듯 팔랑대며 까만 호수에 먹혀든다. 깨알같이 적어넣은 풀이가 아까운 것도 잠시, 이미 머릿속에 이어놓은 식과 끝내 얻은 답을 되새기며 그거면 되었다, 할 무렵 흐릿한 바람소리 사이로 남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가야지, 이제.”

  밤이야, 꼭 그렇게 말할 것처럼. 말끝의 공기가 한 동안 호흡을 품는다. 그래, 밤이다. 이유없이 남자의 동행을 묵인하며 여기까지 온 것처럼, 미련없이 혼자임을 용인하며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다시 걷고, 또 걷는다. 처음 나설 때의 목적은 저 멀리 흐려지고, 예정에 없던 일로 시간을 쓰다 돌아온 방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대로다. 어둑한 방을 천천히 가로질러 간다.

  네가 있다. 제법 멀끔히 차려 입은 채 축축하게 젖어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종잇장을 들고, 나를 본다. 눈에 힘을 주어 네 손에 들린 그것과, 그새 또렷해진 네 얼굴을 찬찬히 뜯어본다. 너였구나, 하기가 무섭게 네가 작게 웃는다. 담담히 닫혔던 입이 열린다.

“다시 찾고 싶었어?”

  그리웠어? 네 말이 꼭 그렇게 들린다. 호수에 먹혀들던 종이 한 장에 느꼈던 찰나의 안타까움은 이제 없다. 기억도 하지 않을 생각이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럴 수 밖에 없어서다. 내가 그것을, 나의 어설픈 추억이며 일상인 그것을 쥐어준 그 남루한 남자가 너였다는 걸 알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