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칠 때가 됐다는 것처럼 / 런런219
흰 종이 위에 붉은 빛이 드리워졌다. 지는 석양에 글씨가 일렁여, 눈을 강박적으로 깜박거린다. 창문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분명 밝을 때가 아까였는데. 금세 어둠이 내려앉을 것만 같다. 이에 나는 펜을 놓는다. 밤에는 그만 생각해야지. 밖은 해가 꼬리를 남기고, 바람을 타는 까마귀가 몇 번 울음을 토하는 거였다. 창문을 닫을까. 나는 그리하여 처음으로 일어선다. 닫는데 새삼 팔다리가 저렸다. 쉬어야 하는데. 뭔가 기분 전환으로, 아래층으로 가야 하는데. 묘하게 너의 생각이 났다. 흐릿하게 맴돌고, 붙잡는 형상. 무얼 또 그런 생각을. 또 그런 기억을. 나는 그저 그것에 아닌 척 몰두하느라 계단에서 자빠질 뻔한 것만 자책한다.
거실은 내가 돌보지 않는 탓에 어둠이 가득했다. 깜깜해서 눈앞이 흐려진다. 불을 켜기 싫은 마음에 거실은 휘 둘러만 보고 부엌으로 향한다.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원래 내가 하던 대로, 저녁거리를 먹어야 할 것이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냉장고를 연다. 사과 몇 개. 대책없이 찬장을 연다. 곰팡이. 내가 아무리 미쳤기를 곰팡이 핀 사과를 먹는 것으로 두진 않는다. (사과는 모두 괜찮았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사과든지 뭐든지를 사러갈 상황에 놓였다. 무작정 문을 잠그고 나와본다. 벌써 가을? 바람이 꽤 불었다. 아까는 이렇지 않았는데. 쌀쌀한 바람을 맞는 맨발을 신발에 대충 끼워넣는다. 발은 벌써 시리고 까진다.
이 시간대의 도로는 익숙하지 않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해는 거의 다 지고, 아스팔트에서만 미약한 열기가 낮을 기약한다. 천천히, 걸었다. 왜 서두르겠는가. 아무도 없었고, 정말 아무도 없었다. 아무가 길을 천천히 걸었다. 음식은 어디서 사지요. 모르겠다며 나는 고개를 젓는다. 그래도 어디로 걸을지는 뻔했다.
...라는 이유로 나는 어딘가를 또 간다. 딱히 걷는 느낌은 아니었다. 똑같지만 다른 사이를 건너고, 모든 감각을 모른체했다. 요컨대 나는 모르는 도시를 걷는다는 거다. 기어가지 않는 한 어쨌든 걸어가고 있었다. 앉아버리고 싶은 마음은 이미 지났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습게도 위태로운 기분이었다. 바람이 불었다. 귀 옆에서 휭휭, 감쌌다. 아무도 없기에 그렇겠지. 나는 가을을 위로했다. 너야, 뜬금없이 그것을 읽을 수 있다면 좋을텐데. 차마 머릿속에서 박박 긁어내지는 못하고 에둘러 퍼놓은 글자였다. 그래도 너는 이해할 수 있겠지. 하지만 너는 혼란스러울지도 모른다. 상상력에 비해 우리의 상황은 초라하고. 그리고 나는 너의 머리가 어딜 향해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
다만 다짜고짜 이쪽으로 시선을 향하는 건 어느 새 나타난 이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뭐라고 부르든 아닐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석양의 마지막에, 갑자기 마주한 둘이었다. 전혀 알아볼 수 없는 사람. 분명 내가 해의 흔적을 등지고 있는데. 그에게서 바람처럼 말이 흘렀다.
"되찾고 싶습니까?"
스윽, 스쳐간다. 나는 이 사람을 마냥 보았다. 이상한 도시에 걸맞는 사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뭔데-, 하고 다시 빤한 눈길로 바라본다. 이 사람은 고개만 끄덕 하더니 머뭇 다가와 손을 살짝 건드렸다. 몇 번의 되물음이 오가고, 이 사람은 겨우 내 손끝만 붙잡고 종종 걷는다.
그렇게 다다른 게 구석의 호수였다. 호수 중에서도 우리는 괜히 비탈길을 올라, 콘크리트 벽 위에 앉는다. 아래는 낮고 낮다. 높구나, 댐인가. 물은 거의 말라 바닥만 채우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떨어지면 죽겠다- 고 했고, 이 사람은 아까부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한다. 약속처럼 우리는 돌을 몇 개 주워다 뜻없이 아래로 던진다. 내가 던지면 깽깽 부서지고 튀는 소리만 난다. 이 사람은 돌이 다른 것도 아닌데 퍽퍽 바닥에 안착을 한다. 나는 네 소리가 좋다고 내 돌도 자꾸만 주었다. 묵직한 소리가 계속 울렸다. 퍽, 퍽. 가끔가다 철퍽.
완전히 깜깜해져도 그 소린 듣기 좋았다. 돌은 짙게 낀 어둠을 안고 바닥에 끌려간다. 물은 별 수 없이 사방으로 튀고. 구경하다 다리가 아파 벽에 같이 걸터앉았다. 다리를 흔들거리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돌처럼, 그치- 하는 말을 어리광처럼 속삭였다. 이 사람은 가만히 있더니 천천히 내게 눈길을 옮겼다. 가까이 있어도, 멀리 있는 것처럼. 말소리가 그랬다. 전혀 알 수 없음도 물론이고.
"그거 주세요."
그렇다면 이것은 또 다른 알 수 없음. 나는 불안하게 되물었다. 이 사람은 표정도 안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말투는.
"그거..."
"제대로,"
"...손에, 요."
그러고보니 나는 나뭇잎쯤으로 생각했던 게 내 손에 구겨져 들려있었다. 밤에도 하얗게 빛나는 종이. 펴보고 나니까 아까 책상 위의 그 종이였다. 몇 시간 전의 내 글씨가 쓰여져있는 걸 보니 같잖았다. 나는 종이를 이 사람에게 쥐어주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별로 글씨를 자세히 보지도 않고 내가 쥐여준 그대로, 주먹쥔 제 손과 구겨진 하얀 면만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거였다. 종이는 곧 돌이 되어, 이 사람은 그냥 종이를 돌 던지듯 던져버렸다. 철퍽 하는 소리가 났다. 똑같이. 아랠 내려다보니 하얀 점이 젖어 흩어지고 있었다. 나는 이 사람을 보았다. 뭔가 찾으려는 마음이었다. 이 사람도 나를 보았다. 그건 무슨 마음이었을지.
"집에 가야 해요."
이 사람은 말해버리고, 날 재촉하듯 살짝 밀었다. 가요. 어디를. 너도 집에 가야 한다는 뜻이니. 누가, 누구의 어디에 가야하는데. 모두 말 그대로 벼랑에 몰린 모습이었다.
생각보다 걸어온 길은 짧았다. 뛰어서 오 분, 십 분이었다. 길을 잃을 걱정을 하지 않자 금방 와버린 걸지도 몰랐다. 문을 열고, 들어서고, 거실 앞에서 멈칫한다. 시간이 뭐가 흘렀냐는듯 변한 것 없는 거실. 나는 조용히 거기 발을 놓았다. 거기 네가 있다. 그래서다. 나는 돌이었다. 돌처럼 굳거나, 이 곳에 이끌렸다. 너는 아주 엉망이 된 종이를 들고 있다.
"짜요, 물이."
더러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종이. 너는 울 듯 웃으며 내게 그렇게 말했다.
"네가 흘린 것처럼. 짜요."
나는 입술만 깨물었다. 너는 이 사람이었다. 그냥 그랬던 것이다. 눈물이 말라버릴 때가 좋은 때였는데. 이제 네가 울고 있었다. 이끌렸다. 이제야 겨우 나는 돌처럼 몸을 던져 네 눈물을 잠시라도 없애고 싶은데.
"되찾고 싶었어요?"
그 말에 나는 언제든지.